<피아노 프리즘 : 보이지 않는 도시들> 기록영상 풀버젼 (1부)

피아노 프리즘 : 보이지 않는 도시들


미디어극장 아이공

2020. 5. 28 - 6.07 



작가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영상 작업을 보여주는 방식의 전시/공연 이다. 이번 개인전은 한 권의 책으로부터 출발했다.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는 여행가가 등장한다.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도시들을 다녀와 시적인 표현으로 소개한다. 천천히 읽어보니 그 도시들은 단지 상상 속에 있지 않았다. 어떤 도시는 세월호가 적나라하게 읽혔고, 어떤 도시는 강정마을이, 장애인이, 익숙한 재개발 현장이 보였다. 평소에 관심 가져온 사회적 이슈를 그 도시들에 투영해 영상을 제작했다. 나는 이번 전시에서 그 소설 속 여행가(마르코 폴로)가 되어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다. 1부는 메인작품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단독공연 했고, 2부는 오의진 작가의 드럼과 진행했다. 





■ 작가노트



프로코피아

2014년 4월, 진도체육관에 도착해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려본다. 실내 바닥을 온통 뒤덮은 색색의 알록달록한 이불 이미지는 눈을 어지럽게 했다. 나뿐 아니었다.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어딜 봐야할지 몰랐고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말을 꺼낼 수 없었고 들어야 할 귀에는 침묵만 이어졌다. 햇살 좋은 날이었다. 팽목항에서 바다 쪽으로 의자를 놓고 앉아있던 유가족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다. 앞모습도 뒷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얼굴을 가질 수 있는 자 아무도 없었다. 그해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 열흘동안 단식하던 정치인은 2년 후 대통령이 되었다. 2019년 12월, 2020년 3월에 연이어 희생자 유가족이 자살했다.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의 죽음이 계속되고 있다. 



테클라

2015년 1월, 해군기지 공사로 앓던 제주 강정마을에 행정대집행이 예고되었다. 행정대집행이란 '무단점거'라고 국가가 판단한 판단한 사항에 용역을 불러 점거자들을 물리적으로 몰아낸다는 뜻이다. 예고된 집행 날의 전날 밤, 강정마을을 방문했다. 사람들은 현장에서 3층 높이의 철로 된 구조물을 다급하게 올리고 있었다. 내일 동이 트면 우리가 견고하게 쌓았던 것들이 저들에 의해 풍비박산날거라는 예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레미제라블의 바리게이트처럼, 5.18의 시민군처럼 그렇게 무너질 예정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손에서 손으로 자재들을 옮겼다. 허술하고 튼튼한 구조물이 쌓이는 사이 별안간 눈이 내렸다. 누군가는 모닥불을 피웠고 누군가는 어딘가를 향해 절을 했다. 그 밤을 기억한다.



옥타비아

사람이 먼저다? 사람이 먼지다. 곡기를 끊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투쟁하는 방법은 최소한 인간 존엄성이라는 가치를 모두가 믿고 있을거라는 세계를 가정해야만 유효하다. 그러나 노동자 김용균의 경우처럼 사람이 기계에 갈려도 태연하게 노동을 지시하는 시대가 아닌가. 인간 목숨은 최후의 보루조차 될 수 없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단식, 고공 투쟁을 강행하는 이유가 뭘까. "비존재보다는 차라리 재난이 낫다"는 바디우의 문장을 떠올려본다. 재난을 택함으로서만 투명한 존재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 몸을 파괴해야 몸을 얻는 사람들. 그들이 꿈꾸는 세상, 그렇게 어려울까. 



페렌치아 

어느 해 4월 20일(장애인의 날)에 엄마와 나는 세종대로에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휠체어 탄 장애인들은 일시에 거리를 점거했다. 그리고 스프레이로 바닥에 글씨를 남기고 사라졌다. "같이 삽시다." 이 도시는 장애인을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하는 대신에 고립된 시설을 만들어 한꺼번에 가두기를 선택한다. 영화감독이자 정치인 장혜영은 말한다. "흔히 우리 사회를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하죠. 하지만 그 곳에 입장조차 하지 못하는 운동장 밖의 존재들도 있습니다." 그 존재와 가까운 곳에 엄마와 내가 있다. 어느날 엄마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신체장애를 갖게 되었고, 뒤이어 나는 공황장애를 겪었다. 그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장애의 세계'를 관심있게 들여다보고 있다.



제노비아

자고 일어난 사이 또 누군가의 삶이 철거되었다. 한 장소에서 20년 넘게 꾸려왔던 길거리 상인들이 표적이 되었다. 민원의 주인공은 바로 옆 아파트 주민들. 미관상 아름답지 않음이 그 사유였다. 사회는 신속하게 이웃의 삶에 불법 선고를 내렸다. 삶이 삭제된 자리에는 그 장소를 다시 점유하지 못하도록 커다란 화분이 들어섰다. 화분에 피어있는 예쁜 꽃을 보며 생각했다. 누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던거 같은데. 비슷한 시기, 또 다른 곳에서는 대낮 골목길에 이불을 깔고 누워 공사 차량을 저지하는 주민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한번도 마주칠 기회가 없없던 사람들은 사라질 때가 되어서야 비명으로 존재를 알리고 자취를 감춘다.



아르지아

간밤에 말이 너무 많았나. 지난 술자리를 후회한다. 왜 갑자기 짧은 순간 열변을 토했나. 행동으로 실천하지도 않는 의제에 관해 마치 오랜기간 숙고해온 사람마냥 옳은 말들을 너무 쏟아냈다. 책에서 본 내용들, 어디서 보기만 했거나 듣기만 했던 멋있는 말들, 국가폭력, 젠더, 장애, 성소수자 등 이런 문제가 중요하다고, 오직 말로만 이루진 세계안에 편안하게 거주하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묻는다. 너 그럴 자격이 돼? 20대 후반의 나는 골방 예술가를 벗어나 부당한 사회를 바꾸려 거리로 뛰쳐나온 현장 예술가를 동경했다. 내 방향도 그쪽일 거라 확신했다. 거긴 뜨거웠다. 그러나 뜨거움이 지나가자 내 진짜 모습을 보았다. 나는 요즘 좁은 방에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피아노만 친다. 이런 나도 액티비스트일 수 있을까. 



베르셰바

사람들은 볼만한 것들을 관광하고 간직할만한 것들을 기념한다. 관광과 기념의 기준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1950년대 미국 네바다에서는 핵실험 장소가 관광 상품이었다. 버섯구름을 보며 사람들은 환호했다. 전역으로 생중계도 했다. 원자폭탄 관련한 기념품도 제작되어 널리 판매했다. 사람들은 무엇을 관광하고 있는지 몰랐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을 했다. 전쟁기념관은 그 묵념의 대상을 기념하고자 만든 장소다. 최근 이길보라 감독의 다큐멘터리 <기억의 전쟁>을 봤다. 한국군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한, 민간인 학살 생존자 응우엔  티 탄이 나온다. 그는 용기를 내어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사과를 요구한다. 응답은 없다. 우리는 무엇을 기념하고 있었을까.



에우메피아

이야기는 인간을 지배한다. 비참에 빠뜨리는 것도 구원하는 것도 이야기다.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처럼 날 이끌어줄 더 좋은 이야기가 필요하며 친구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이야기, 고통스런 순간에 비상식량처럼 꺼낼 무기같은 이야기도 꼭 구비해서 냉장고에 고이 간직해야 한다. 유통기한이 지난 이야기는 봉투에 넣어 폐기해야 하며, 어떤 이야기로부터는 사력을 다해 빠져나와야 한다. 이랑 노래가사처럼 "사람들은 여전히 좋은 이야기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이유다. 이야기는 명사이면서 동사다. 너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레이먼드 커버의 <대성당> 등장인물처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던 이들이 함께 펜을 잡고 커다란 형상을 그려볼 수도 있지 않을까. 








2부 : 세월호 추모곡 '엄마의 바다' (유희열 작곡) with 오의진 작가
2부 : 블라인드 필름 with 오의진 작가
2부 : 화가의 숲 (작곡 : 안은지)